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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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1921년 프라하에서 창당되었으며, 소련을 제외한 유럽 국가 중 높은 지지를 받았다. 코민테른의 체코슬로바키아 지부로서 1928년에는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이후 불법화되었지만 지하 조직으로 저항을 이어갔으며, 2차 세계대전 후 연립 정부에 참여했다. 1948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후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스탈린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개혁 시도 이후 소련의 개입으로 개혁은 좌절되었고, 1969년 구스타프 후사크가 지도자가 되어 정상화 체제를 유지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공산당의 권력이 종식되었고,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여러 정당으로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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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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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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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
로마자 표기 | Komunistická strana Československa |
약칭 | KSČ |
창립일 | 1921년 5월 16일 |
해산일 | 1992년 4월 7일 |
해산 이유 | 체코슬로바키아의 분열 |
후계 정당 | 보헤미아 모라바 공산당 (체코) 슬로바키아 공산당 (슬로바키아) |
본부 | 프라하, 체코슬로바키아 |
기관지 | 루데 프라보 프라브다 문카시 |
청년 조직 | 체코슬로바키아 청년 공산주의자 연맹 (1921년–1936년) 체코슬로바키아 청년 연맹 (1949년–1968년) 사회주의 청년 연맹 (1970년–1989년) |
준군사 조직 | 인민 민병대 |
색상 | 빨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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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및 정치 | |
정치 성향 | 극좌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1956년까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1968년) 후사크주의 (1969년 이후) |
국제 조직 | 코민테른 (1921년–1943년) 코민포름 (1947년–1956년) |
국내 조직 | 국민 전선 (1943년–1990년) |
주요 인물 | |
초대 서기장 | 바츨라프 슈투르츠 |
마지막 서기장 | 라디슬라프 아다메츠 |
2. 역사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은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에서 분리되어 창당되었다.[1] 제1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시기에는 합법적인 정당으로 활동하며 상당한 지지세를 확보하기도 했으나, 1938년 뮌헨 협정 이후 불법화되어 지하 활동을 전개했다.[4][5][6][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의 영향력 증대와 함께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여 1946년 총선에서 제1당이 되었고, 1948년 2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일당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이후 클레멘트 고트발트의 지도 아래 스탈린주의적 통치와 대규모 숙청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 들어 경제 침체와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면서 1968년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주도로 '인간적인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한 프라하의 봄 개혁 운동이 일어났으나, 소련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 기구 군대의 침공으로 좌절되었다. 이후 구스타프 후사크가 집권하여 '정상화' 정책을 추진하며 경직된 체제를 유지했으나, 헌장 77과 같은 반체제 운동은 계속되었다.
1980년대 말 동유럽의 민주화 물결 속에서 1989년 벨벳 혁명이 일어나면서 공산당 정권은 평화적으로 붕괴되었다. 혁명 이후 공산당은 연방 조직으로 개편되었으나,[13][11]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면서 각각 보헤미아·모라비아 공산당(KSČM)과 슬로바키아 공산당(KSS) 등으로 분화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16]
2. 1. 창당과 초기 활동 (1921년 ~ 1945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8년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는, 특히 서부 공업 지대인 보헤미아 등지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21년 5월 14일부터 5월 16일까지 프라하에서 열린 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 좌파 대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이 공식적으로 창당되었다.[1] 이전 사회민주당 좌파의 기관지였던 『루데 프라보』(Rudé právo)는 공산당의 중앙 기관지가 되었다. 초대 의장으로는 바츨라프 슈투르츠(Václav Šturc)가 선출되었으며, 제1 부의장은 보후미르 슈메랄(Bohumír Šmeral), 제2 부의장은 바츨라프 볼렌(Vaclav Bolen)이 맡았다.공산당은 제1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시기 의원내각제 하에서 활동한 약 20개 정당 중 하나였으나, 토마시 마사리크나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 시기 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야당으로 남았다. 1925년 총선에서는 934,223표(13.2%)를 얻어 41석을 확보하며 제2당의 위치에 오르기도 했다. 공산당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체코슬로바키아 지부였으며, 1928년 기준 약 138,000명의 당원을 보유하여 코민테른 내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2] 이는 당시 프랑스 공산당의 두 배, 중국 공산당의 거의 다섯 배에 달하는 숫자였다.[3]

1929년에는 클레멘트 고트발트(Klement Gottwald)가 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레온 트로츠키 지지 세력을 포함한 여러 반대파가 숙청되었다. 1929년 총선에서는 753,220표(10.2%)를 얻어 30석을, 1935년 총선에서는 849,495표(10.32%)를 얻어 30석을 유지하며 꾸준한 지지세를 보였다. 이는 소비에트 연방을 제외한 유럽 국가 공산당 중에서는 높은 수준의 지지율이었다.
1938년 뮌헨 협정 이후 들어선 제2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시기인 10월 20일, 공산당은 불법화되었다.[4][5][6][7] 그러나 당은 지하 조직으로 활동을 계속했다.[8] 1939년 3월 14일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하여 보헤미아 모라비아 보호령과 괴뢰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만들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독소 불가침 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후인 1939년 10월 프라하에서 반독일 시위가 발생했을 때,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공산당은 이를 "쇼비니즘적 요소"의 발현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8]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많은 공산당 지도자들은 소련으로 망명하여 전후를 대비했으며, 국내에서는 당원들이 나치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많은 당원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희생되었다. 소련으로 망명한 당원들은 1941년 독소 전쟁 발발 이후 소련 적군에 합류하여 싸웠다. 공산당은 런던의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대통령 에드바르트 베네시)와 협력 관계를 구축했으며, 이는 1943년 소련-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 간 우호 협력 상호 원조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1944년 8월, 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망명 정부와 협력하여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를 일으켰으나, 독일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945년 4월 5일, 소련군과 함께 귀국한 공산당 지도부는 슬로바키아 동부 코시체에서 망명 정부의 귀환과 공산당의 연립 정부 참여를 골자로 하는 코시체 선언을 발표했다. 같은 해 5월 독일 항복 후, 귀국한 베네시 대통령 하에 공산당이 참여하는 국민전선 정부가 수립되었다.
2. 2. 권력 장악과 일당 독재 (1945년 ~ 1968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5년 4월 5일, 소련군과 함께 귀국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슬로바키아 동부 코시체에서 코시체 선언을 발표하며 망명 정부의 귀환과 공산당의 연립 정부 참여를 제안했다. 같은 해 5월 독일이 항복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이 소련군 점령 하에 놓이자, 귀국한 에드바르트 베네시를 대통령으로 하는 국민전선 정부가 수립되었고 공산당도 여기에 참여했다. 전후 공산당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여 1946년 총선거 당시 당원 수가 100만 명에 달했다.[3] 이 선거에서 공산당은 38%의 득표율로 제1당이 되었고, 당 의장 클레멘트 고트발트가 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체코(41%)와 슬로바키아(30%) 모두 과반수를 얻지는 못했으며, 미국과 영국, 소련 사이에서 중립을 지향하던 베네시 대통령 및 얀 마사리크 외무장관과 소련군 주둔을 배경으로 영향력 확대를 꾀하던 고트발트 총리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다.1948년 2월, 마셜 플랜 수용 거부 등 공산당의 압력이 커지자 비공산주의 정당 소속 각료들이 베네시 대통령에게 집단 사표를 제출했다. 공산당은 이를 기회로 삼아 수도 프라하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고 압력을 가해, 내각을 공산당 및 그 동조 세력으로 채우며 실권을 장악했다. 공산당은 이 사건을 “2월의 승리”라고 불렀다. 이 쿠데타 이후 자유 선거와 정치적 자유는 사실상 사라졌다. 권력은 공식적으로 민족전선에 넘어갔는데, 이는 공산당이 의석의 3분의 2를, 나머지 5개 정당이 3분의 1을 차지하는 연합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산당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고 다른 정당들은 형식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정부 구조 자체가 공산당의 정책 결정을 집행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쿠데타 직후인 3월 10일에는 얀 마사리크 외무장관이 외무부 건물에서 추락사한 채 발견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처리되었으나 공산당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6월 7일 베네시 대통령이 사임했고(같은 해 9월 3일 사망), 7월 고트발트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인 인민민주주의가 선포되었다.
1929년부터 공산당 서기장을 지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모스크바에서 활동했던 고트발트는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에게 매우 충실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탈린의 통치 방식을 그대로 따라 전전 체코슬로바키아의 의회 제도를 폐기하고, 다른 정당 지지자들을 부르주아지나 나치 협력자로 몰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숙청의 칼날은 공산당 내부로도 향했다. 특히 전후에도 존속했던 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분리주의나 티토주의 성향을 가졌다는 의심을 받아 많은 당원들이 희생되었다. 고트발트와 당 서기장 루돌프 슬란스키 사이에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련 모델을 얼마나 따라야 하는지를 두고 갈등이 있었다. 결국 1951년, 슬란스키와 블라디미르 클레멘티스 외무장관 등 고위 당원들이 Trotskyist-Titoist-Zionist conspiracy|트로츠키주의-티토주의-시온주의 음모eng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1952년 11월, 이른바 슬란스키 재판(프라하 재판)이라는 쇼 재판이 열렸고, 슬란스키를 포함한 11명이 티토주의자, 트로츠키스트, 미국의 스파이라는 오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9]
경제 정책 면에서도 고트발트는 스탈린 모델을 그대로 따랐다. 모든 생산 시설이 국유화되었고, 중세부터 이어져 온 자유 농민의 전통을 깨뜨리는 농업 집단화가 강압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는 “미니 스탈린”이라 불릴 만큼 스탈린주의적인 소련식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고, 같은 해 5월 14일 고트발트마저 급사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안토닌 노보트니가 당 제1서기로서 점차 권력을 강화했고, 슬란스키 재판의 주요 피고였던 안토닌 자포토츠키가 1957년 사망하자 대통령직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노보트니는 스탈린 사후 동유럽에서 일어난 반소련 움직임을 억누르는 데 주력했다. 헝가리 혁명 당시 소련의 군사 개입을 지지했으며, 1960년에는 국호를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한편, 고트발트 시대 숙청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도 조심스럽게 진행하여, 1963년에는 슬란스키 재판이 부당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화 조치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중앙집권적이고 경직된 정치·경제 시스템은 1960년대 초 경제 침체를 야기했다.[10] 서방 국가들과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면서 공산당과 노보트니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1967년부터 노보트니에 대한 비판이 공공연하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비판의 중심에는 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였던 알렉산더 두브체크가 있었다. 그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슬로바키아의 지위 향상을 주장하며 체코보다 먼저 언론 자유화 등을 추진하고 있었다. 결국 1968년, 두브체크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당권을 장악하고 "인간적인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세운 프라하의 봄이라는 자유화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소련 지도부는 이러한 개혁이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판단했고, 1968년 8월 21일 바르샤바 조약 기구 군대를 투입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이 침공은 이후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정당화되었다.
2. 3. 프라하의 봄과 소련의 개입 (1968년)
1953년 스탈린과 고트발트의 사망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내에서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집단 지도 체제 속에서 안토닌 노보트니는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1957년에는 당 제1서기와 대통령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노보트니는 탈스탈린화 흐름 속에서도 소련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며,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소련의 군사 개입을 지지했다. 1960년에는 국호를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경하며 체제 강화를 시도하였다. 한편으로는 스탈린 시대 숙청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을 신중하게 진행하였고, 1963년 슬란스키 재판의 부당성을 인정하기도 했다.그러나 노보트니의 제한적인 자유화 조치는 사회의 요구를 따라가지 못했다.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는 경직되었고, 1960년대 들어 서방 국가들과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면서 국민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특히 슬로바키아 지역에서는 체코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 강하였다.
1967년부터 노보트니에 대한 비판이 공공연하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였던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있었다. 그는 슬로바키아의 자치권 확대와 함께 체코보다 앞서 언론 자유화 등을 추진하며 개혁 성향을 보였다. 결국 1968년 1월 5일, 당 중앙위원회는 둡체크를 새로운 당 제1서기로 선출했다. 노보트니는 3월 21일 대통령직에서도 물러났다.
둡체크 지도부는 검열 폐지를 포함한 광범위한 자유화 조치에 착수하였다. 이는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개혁 운동의 시작이었다. 1968년 4월, 당 중앙위원회는 「행동 강령」을 채택했는데, 여기에는 당 운영의 민주화, 과거 정치 숙청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 경제학자 오타 시크가 제안한 시장경제 요소 도입,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확대, 소련과의 동맹 관계는 유지하되 서방 국가들과의 경제 관계 강화 등이 포함되었다.
둡체크는 이러한 개혁을 통해 공산당의 영도적 역할을 유지하면서도 정치·경제 시스템에 민주주의와 인본주의 요소를 도입하려는, 이른바 '인간적인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다. 이는 공산당 일당 독재의 틀은 유지하되, 경직된 통제에서 벗어나 시민들의 자유를 확대하고 경제 시스템에 시장 원리를 일부 도입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자유화된 언론을 통해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두 천 단어 선언』처럼 당 외부로부터 더욱 급진적인 개혁 요구가 분출되자 소련과 동유럽의 보수적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특히 소련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등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이 자국의 체제 안정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소련은 사회주의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별 국가의 주권이 제한될 수 있다는 이른바 '브레즈네프 독트린'(제한 주권론)을 내세우며 둡체크 지도부에 개혁 중단과 통제 강화를 압박하였다. 하지만 둡체크는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1968년 8월 20일 밤, 소련군을 주축으로 폴란드, 동독, 헝가리, 불가리아 군대로 구성된 바르샤바 조약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전격 침공했다. 군대는 순식간에 전 국토를 점령하고 둡체크를 비롯한 당과 정부의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모스크바로 압송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침공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루드비크 스보보다 대통령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둡체크 등의 석방과 귀국을 이끌어냈다. 둡체크는 형식상 당 제1서기직에 복귀했지만, 소련의 강력한 감시와 간섭 속에서 더 이상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와 소련의 압력 사이에서 그의 지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당내 보수파의 반격도 거세졌다.
결국 1969년 4월, 둡체크는 제1서기직에서 해임되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군사 개입 이후 소련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구스타프 후사크가 임명되었다. 후사크는 1951년 스탈린 시대 숙청 당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1960년 석방되고 1963년 복권된 복잡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프라하의 봄 기간에는 부총리를 맡기도 했으나, 권력을 잡은 후에는 과거의 개혁을 부정하고 소련의 요구에 순응하는 정상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둡체크는 1970년 터키 주재 대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공산당에서 제명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프라하의 봄을 이끌었던 다른 개혁파 인사들도 당과 사회에서 축출되어 망명하거나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후사크 정권 하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다시 경직된 사회주의 체제로 회귀했으며, 이는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후사크 정권은 온건파(실용주의파)와 강경파가 공존하는 형태였다. 후사크 자신은 온건파를 대표하였지만, 바실 빌락과 같은 강경파의 견제도 받았다. 1987년까지 권력을 유지했던 주요 온건파/실용주의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주요 직책 |
---|---|
루보미르 슈트로우갈(Lubomír Štrougal) | 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페테르 콜로트카(Peter Colotka) |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총리 |
요제프 레나르트(Jozef Lenárt) | 슬로바키아 공산당(KSS) 제1서기 |
요세프 켐프니(Josef Kempný) | 체코 국민의회 의장 |
이들은 대부분 프라하의 봄 당시 개혁을 지지했지만, 소련의 침공 이후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여 권력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이후 경제 개혁이나 반체제 활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근본적으로는 후사크의 '정상화' 노선에 동조하였다.
2. 4. 정상화 체제와 반체제 운동 (1969년 ~ 1989년)
1969년 4월, 프라하의 봄을 이끌었던 알렉산데르 둡체크는 당 서기장직에서 해임되었고, 구스타프 후사크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둡체크는 1970년에 당에서 추방당했으며,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소위 정상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 공산당(KSČ)은 온건파(실용주의파)와 강경파라는 두 주요 파벌에 의해 운영되었다.온건파 및 실용주의자 그룹은 구스타프 후사크가 대표했다. 그는 KSČ 지도부 내 신스탈린주의 경향을 이끌었지만, 바실 빌락과 같은 강경파의 견제도 받았다. 후사크는 1943년부터 1950년까지 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중요 간부였으나, 1951년 스탈린주의 숙청 과정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살았다. 1960년 석방되어 1963년 복권된 후, 안토닌 노보트니 정권 하에서는 정치적 역할을 거부했지만, 노보트니 실각 후 프라하의 봄 시기에는 부총리를 지냈다. 둡체크 사임 후 1969년 4월 KSČ 제1서기가 되었고, 1975년 7월에는 대통령직에도 올랐다. 후사크는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집권 후에는 둡체크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후사크 정권은 외교와 국내 통치의 “'''정상화'''”를 내세우며,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연방화를 제외하고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 체제를 거의 전부 노보트니 시대의 것으로 되돌리고, 소련에 가장 충실한 동맹국으로 행세하려 했다. 프라하의 봄은 사회주의 체제 전복을 노린 부르주아 세력이 외국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반혁명 음모로 규정되었고, 사회주의 혁명을 지키기 위해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의 개입은 정당하고 필요했다고 하며, 이탈리아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의 비난에 반박했다. 1969년에 대규모 중소 국경 분쟁으로까지 악화된 중소 갈등에서도 전면적으로 소련 편을 들었다. 1971년에는 자신의 직책 명칭을 소련 공산당을 본떠 “서기장”으로 개칭했고, 1975년에는 스보보다의 사퇴를 받아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상화 시기 공산당 내 주요 파벌과 인물은 다음과 같다.
파벌 | 주요 인물 | 직책 (주요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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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파 (실용주의파) | 구스타프 후사크 | KSČ 제1서기/서기장 (1969~1987), 대통령 (1975~1989) |
루보미르 슈트로우갈 | 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
페테르 콜로트카 |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총리 | |
요제프 레나르트 | 슬로바키아 공산당(KSS) 제1서기 | |
강경파 | 바실 빌락 | 중앙위원회 위원, 당 이념위원회 위원장 |
카렐 호프만 | 중앙위원회 서기, 중앙위원회 위원 | |
안토닌 카페크 | 중앙위원회 위원 | |
얀 포이티크 | 서기 | |
알로이스 인드라 | 중앙위원회 위원, 연방의회 의장 | |
밀로스 야케시 | 중앙감독감사위원회 위원장, 중앙위원회 위원 (후사크 후임 서기장, 1987~1989) |
온건파 지도자들은 대부분 1960년대 후반 둡체크 시대의 개혁을 지지했지만, 소련 침공 이후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여 당의 정통 노선을 따랐다. 이들은 이후 경제 개혁이나 반체제 활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반면, 강경파는 어떠한 경제적, 정치적 개혁에도 반대했으며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강경한 탄압을 주장했다.
이러한 '정상화' 정책은 표면적으로 국내 혼란을 수습하는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공산당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더욱 심화시켰다. 1977년, 전 공산당 간부이자 프라하의 봄 당시 행동 강령 작성에 참여했던 즈데네크 므리나르와 극작가이자 반체제 활동가인 바츨라프 하벨 등을 중심으로 『헌장 77』이 발표되었다. 이 문서는 후사크 정권의 인권 탄압이 헬싱키 선언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부는 헌장 서명자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므리나르는 해외로 추방되었고, 하벨과 같은 다른 서명자들은 실직, 투옥, 감시 등 사회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당시 경제 개혁을 추진하던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카다르 야노시 정권과 달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개혁에 대한 어떠한 관용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후사크는 1987년까지 권력을 유지했으나, 당 서기장직은 밀로스 야케시에게 넘어갔다. 1989년, 벨벳 혁명이 일어나면서 공산당의 일당 독재는 막을 내렸다. 11월, 야케시와 중앙위원회 전체가 사퇴했고, 그의 뒤를 이은 카렐 우르바네크는 약 한 달간 집권한 뒤 12월에 당의 공식적인 권력 포기를 선언했다. 서기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대통령직을 유지하던 후사크는 결국 그해 말, 41년 만에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비공산주의 정부를 임명해야만 했다.
2. 5. 벨벳 혁명과 민주화 (1989년)
1985년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등장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권은 경제 발전과 사회 자유화를 요구하는 민중으로부터의 개혁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경제 침체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1987년 구스타프 후사크는 공산당 서기장직을 밀로스 야케시에게 넘겨주었으나, 대통령직은 유지하며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야케시는 제한적인 경제 개혁을 시도했지만, 언론 자유 확대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 완화에는 소극적이었다.1989년, 동유럽 전역을 휩쓴 1989년 혁명의 물결 속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체제도 급격한 위기를 맞았다. 8월 헝가리에서 열린 판유럽 피크닉을 통해 많은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자, 프라하 주재 서독 대사관에는 휴가차 체코슬로바키아에 머물던 동독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서독과의 협상을 통해 인도적 차원에서 이들의 서독행을 허용했으나, 이는 동독 정부의 반발을 샀고 국내 반체제 세력에게는 민주화 요구의 목소리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는 철의 장막의 해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으며, 주변 동유럽 국가들의 변화를 지켜본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11월 17일 프라하에서 시작된 시위는 점차 규모가 커졌고, 바츨라프 하벨을 중심으로 반체제 인사들이 결집한 시민 포럼(Občanské fórum|오브찬스케 포룸cs)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이 민주화 시위에는 일반 당원들은 물론, 프라하의 봄 당시 개혁을 주도했던 알렉산데르 둡체크와 같은 인물들도 참여하며 힘을 보탰다. 이것이 벨벳 혁명의 시작이었다.
소련의 개입을 기대할 수도 없었고, 군대를 동원한 무력 진압도 불가능해진 공산당 지도부는 결국 민주화 세력과의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24일, 밀로스 야케시 서기장이 사임했고, 12월에는 민주화 조치를 발표했던 라디슬라프 아다메츠 총리마저 물러났다. 12월 10일, 구스타프 후사크 대통령은 41년 만에 비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하는 새 정부 구성을 승인하고 대통령직에서 사퇴했다. 후임 대통령으로는 바츨라프 하벨이, 연방 의회 의장에는 공산당에 복귀하지 않았던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선출되었다. 이 벨벳 혁명을 통해 공산당은 거의 유혈 충돌 없이 41년간 이어온 일당 독재 체제를 상실했다.
혁명 이후, 라디슬라프 아다메츠가 공산당 서기장이 되어 당의 쇄신을 시도했다. 1990년 2월에는 구스타프 후사크를 당에서 제명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공산당이라는 명칭은 유지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다. 또한 연방제 하에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동등성을 강조하기 위해, 3월 보헤미아-모라비아 공산당(KSČM)을 창설하고 기존의 슬로바키아 공산당(KSS)과의 협력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S)을 운영하는 구조로 개편했다.
1990년 11월 3일부터 4일까지 열린 제18차 당 대회에서 당은 공식적으로 KSČS로 개명되었고, KSČM과 KSS 두 정당으로 구성된 연방 체제가 되었다.[13][11] 파볼 카니스(Pavol Kanis)가 KSČS 연방평의회 의장을 맡았다.[12] 그러나 체코 지역의 KSČM과 슬로바키아 지역의 KSS는 점차 다른 정치적 길을 걷게 되었고, 두 조직 사이의 긴장감은 높아졌다.[11] 결국 KSS는 1991년 1월 26일, 당명을 슬로바키아 민주좌파당(SDL)으로 변경하고 공산당 노선을 공식적으로 포기했지만, 형식적으로는 KSČS의 슬로바키아 구성원으로 남아 있었다.[13]
1991년 8월, SDL의 요청에 따라 연방당은 '''보헤미아 및 모라비아 공산당과 민주좌파당의 연합체'''(Federácie KSČM a SDĽ|페데라치에 KSČM 아 SDLcs)로 명칭과 성격이 변경되었다.[14] KSČM은 슬로바키아 내 다른 공산주의 분파인 슬로바키아 공산당 – 91(KSS '91)과 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연합(ZKS)에 연합체 참여를 제안했으나 실패했다.[15] 1991년 12월, SDL은 첫 당 대회에서 KSČM과의 연합체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했다.[13] 이 연합체는 1992년 4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16]
2. 6. 해체와 그 이후 (1990년 ~ 현재)
1990년 11월 3일부터 4일까지 열린 제18차 당 대회에서 당은 KSČS로 이름을 바꾸고, 보헤미아·모라비아 공산당(KSČM)과 슬로바키아 공산당(KSS)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정당으로 구성된 연방 체제로 전환했다.[13][11] Pavol Kanis|파볼 카니스sk가 KSČS 연방평의회 의장을 맡았다.[12] 그러나 체코 지역의 KSČM과 슬로바키아 지역의 KSS는 서로 다른 정치적 방향을 추구하면서 양측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11]1991년 1월 26일, 슬로바키아의 KSS는 당명을 민주좌파당(SDL)으로 변경했다. SDL은 더 이상 공산당을 표방하지 않았지만, 형식적으로는 KSČS의 슬로바키아 구성 조직으로 남아 있었다.[13] 같은 해 8월, SDL의 요청에 따라 연방 조직은 '''보헤미아 및 모라비아 공산당과 민주좌파당의 연합체'''(Federácie KSČM a SDĽcs)로 다시 개편되었다.[14] KSČM은 슬로바키아 내 다른 공산주의 분파인 슬로바키아 공산당 – 91(KSS '91)과 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연합(ZKS)에 연합체 참여를 제안했으나 실패했다.[15] 결국 1991년 12월, SDL은 첫 당 대회에서 KSČM과의 연합체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했으며,[13] 이 연방 조직은 1992년 4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16]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이후, 체코에서는 보헤미아·모라비아 공산당(KSČM)이 주요 야당으로 활동하며 여러 선거에서 10% 초반대의 꾸준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원내 정당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슬로바키아에서는 슬로바키아 공산당(KSS)에 대한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여 최근 선거에서는 국회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등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1995년 3월 10일 체코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이 새로 등록되었다. 1995년 4월 22일 미로슬라프 슈텡판(Miroslav Štěpán)을 총서기로 선출한 이 당은 자신들이 과거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수정주의 노선을 걷는다고 비판한 KSČM의 정통성을 부정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산주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KSČM 당원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정당은 1999년 당명을 '체코 공산당'(Strana československých komunistůcs, SČK)으로 변경했다. 공식 웹사이트는 ksc.cz이며, 여전히 이전 약칭(KSČ)을 사용하고 있다.
SČK는 내부 분열을 겪기도 했다. 2001년에는 벨벳 혁명 당시 국가보안부(SNB) 소속으로 학생 시위대에 잠입했던 루드비크 지프차크(Ludvík Zifčákcs)가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 체코슬로바키아 노동당'(KSČ-ČSSP)이 분리되어 나갔다. 지프차크는 벨벳 혁명 당시 학생 마르틴 슈미트(Martin Šmíd)가 경찰 폭력으로 사망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17]
2014년 슈텡판이 사망[18]하고 지리 바브르(Jiří Vábrcs)가 총서기가 된 후[19], 또 다른 분열이 일어났다. 보이테흐 미시차크(Vojtěch Mišičákcs)는 당의 소극적 활동을 비판하며 '체코 공산당 21'(KSČ21)이라는 새로운 정파를 만들었다. 현재 SČK의 총서기는 즈데네크 클리멕(Zdeněk Klímekcs)이다.[20]
슈텡판이 이끌었던 정당과 그 후계 정당들은 선거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슈텡판은 1996년 체코 상원 선거와 1998년 체코 상원 선거에서 브룬탈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저조한 득표에 그쳤다. 1996년에는 627표(5위)를 얻은 반면, KSČM 후보 로스티슬라프 하라진(Rostislav Harazincs)은 5,294표(3위)를 얻었다.[21] 1998년에는 슈텡판이 716표(7위)를 얻는 데 그쳤고, 하라진은 1차 투표 7,852표, 2차 투표 10,154표를 얻어 당선되었다.[22] 또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재통합을 목표로 하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1995년)(Komunistická strana Československa (1995)cs)도 재건되었지만[25] 소규모 정당으로 남아 영향력은 미미하다.
3. 조직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의 조직 구조는 레닌주의의 핵심 원칙인 민주집중제에 기반을 두었다. 이 원칙은 이론적으로 모든 단계에서 당 지도부를 민주적으로 선출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상급 기관의 결정이 하급 기관과 모든 당원에게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하향식 통제 시스템으로 작동했다.[3][23] 당의 정책 결정과 집행은 소수의 최고 지도부가 장악했으며, 당대회나 중앙위원회 같은 기구들은 대부분 이미 내려진 결정을 추인하는 역할을 했다.
조직은 크게 중앙, 공화국 및 지방, 그리고 기층 단위로 나뉘었다. 중앙 조직의 핵심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국과 당 행정을 총괄하는 사무국이었으며, 명목상의 최고 기관인 당대회와 중앙위원회는 이들의 결정을 뒷받침하는 구조였다. 공화국 차원에서는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에만 별도의 슬로바크 공산당(KSS)이 존재했고, 체코 사회주의 공화국에는 이에 상응하는 조직이 없었다. 지방 조직과 기층 조직은 중앙의 지침을 이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원 구성은 시기에 따라 변화했으며, 특히 집권 초기와 프라하의 봄 이후 대규모 숙청을 통해 당원 구조가 크게 변동되었다.[23][24] 당원 관리는 중앙의 통제 아래 엄격하게 이루어졌고, 지속적인 사상 교육이 강조되었다.
3. 1. 중앙 조직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의 조직은 레닌주의적 개념인 민주집중제에 기반을 두었다. 이 원칙은 모든 단계에서 당 지도부를 선출하도록 허용하면서도, 각 단계가 상위 단계의 통제를 완전히 받도록 요구했다. 따라서 당의 프로그램과 정책은 상위에서 지시되었으며, 상위 기관의 결의는 모든 하위 기관과 개별 당원에게 무조건적인 구속력을 가졌다. 이론적으로는 정책 문제가 당대회, 회의, 당원 회의 및 당 기관지에서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논의되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이러한 논의가 소수의 최고 당 간부들이 내린 결정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에 불과했다.KSČ의 최고 기관은 당대회였다. 일반적으로 5년마다 일주일 미만의 기간 동안 열렸다. 예외적으로 알렉산더 두브체크의 지도 아래 1968년 8월에 열린 제14차 당대회는 프라하의 봄을 진압하기 위한 소련의 점령 초기에 트랙터 공장에서 비밀리에 개최되어 침략을 규탄했다. 이 당대회는 이후 불법으로 선언되어 회의록이 당 기록에서 삭제되었고, 1971년 5월에 두 번째 "합법적인" 제14차 당대회가 열렸다. 그 이후의 당대회는 1976년 4월, 1981년 4월, 1986년 3월에 개최되었다. 당대회는 이론적으로 기본적인 정책 결정을 담당했지만, 실제로는 중앙위원회의 정치국이 결정권과 정책 결정권을 행사했다. 당대회는 단지 최고 당 지도부의 보고와 지시를 승인하는 역할에 그쳤다. 당대회에 부여된 법정 의무에는 당의 국내외 정책 결정, 당 강령과 규약 승인, 중앙위원회와 중앙 감독 및 감사위원회 선출, 그리고 그들의 보고서에 대한 논의 및 승인이 포함되었다.
당대회 사이에는 KSČ의 중앙위원회(CC)가 당 활동을 지휘하고 일반적인 정책 결정을 이행할 책임이 있었다. 당 규약은 또한 중앙위원회가 연방 정부와 공화국의 기관, 국가전선, 그리고 모든 문화 및 전문 기구에 대한 KSČ 통제의 주요 수단으로 기능한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기관에서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당원들은 KSČ 정책의 이행에 대해 중앙위원회에 직접 책임이 있었다. 또한 중앙위원회는 모든 중요한 정부 및 당 직책에 대한 후보를 심사하고 주요 당 기관지인 ''루데 프라보(Rudé právo)''의 편집장을 선출했다. 중앙위원회는 일반적으로 연간 최소 두 번 전체 회의를 열었다. 1976년 중앙위원회는 115명의 위원과 45명의 후보 위원으로 구성되었고, 1986년에는 각각 135명과 62명으로 늘어났다. 구성 면에서 중앙위원회는 일반적으로 주요 당 및 정부 관리, 군 관계자, 그리고 일부 유명 인사들을 포함했다. 중앙위원회 역시 당대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정치국의 정책 결정을 단순히 승인하는 역할을 했다. 다만 1968년 정치국 내 파벌 싸움으로 중앙위원회가 안토닌 노보트니 제1서기를 알렉산더 두브체크로 교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중앙위원회가 투표하는 결정은 사전에 이루어져서 회의에서의 투표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정치국은 전체 위원회 회의 사이에 당 사업을 수행했으며, 공식적으로는 중앙위원회에 의해 선출되었지만 실제로는 최고 당 지도부가 그 구성을 결정했다. 정치국이 실질적인 최고 의사결정 기구였다. 1986년에는 11명의 정식 위원과 6명의 후보 위원이 있었다.
중앙위원회의 사무국은 당의 최고 행정 기관이자 광범위한 통제 메커니즘의 중추 신경 역할을 했다. 사무국은 정치국에서 내린 결정의 이행을 감독하고, 당의 계급 이동을 통제하며, 당과 정부 기구 내의 업무를 지시했다. 구스타프 후사크 체제 하에서 사무국의 구성은 정치국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일관되었으며, 많은 사무총장들이 정치국 위원을 겸임했다.
중앙 감독 및 감사위원회는 당 규율을 감시하고 당 재정을 감독하는 이중적인 역할을 수행했지만, 실질적인 통제 권한은 미미했다. 당 기준을 시행하는 기관으로서 중앙 감독 및 감사위원회는 종종 "일탈적인" 당원들을 정지시키거나 제명하는 권한을 행사했으며, 특히 1970년대 초반 정상화 과정에서 당원 대대적인 숙청을 지휘했다. 위원들은 각 당대회에서 선출되었으며(1986년 45명), 이 위원들은 그들 중에서 위원장, 부위원장 및 소규모 정치국을 선출했다. 이 위원회의 하위 단위는 공화국, 지역 및 지구 단위의 당 구조에도 존재했다.
1987년 기준으로 KSČ에는 인민 감독 위원회, 농업 및 식량 위원회, 경제 위원회, 이데올로기 위원회, 청년 위원회 등 다른 중앙 위원회들도 있었다.
또한 1987년 당 중앙에는 18개의 부서가 있었다.
- 선전선동
- 농업, 식품 산업, 임업 및 수자원 관리
- 코메콘 협력
- 문화
- 경제 행정
- 경제
- 교육 및 과학
- 선출된 국가 기관
- 대외 경제 관계
- 연료 및 에너지
- 산업, 교통 및 통신
- 국제 문제
- 대중 매체
- 정치 조직
- 과학 기술
- 사회 조직 및 국가 위원회
- 국가 행정
- 일반 부서
대부분의 경우 당 부서는 정부의 해당 기관 및 부처와 병행하여 그들의 활동이 KSČ 규범과 프로그램에 부합하는지 감독했다.
중앙위원회의 감독하에 고급 정치학교와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라는 두 개의 당 교육 센터도 운영되었다.
3. 2. 하부 조직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의 조직은 민주집중제 원칙에 따라 구성되었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모든 단계에서 당 지도부를 선출할 수 있도록 했지만, 실제로는 각 하위 조직이 상위 조직의 통제를 철저히 받아야 함을 의미했다. 당의 정책과 결정은 상부에서 내려왔으며, 하위 조직과 개별 당원은 이를 무조건 따라야 했다. 이론상으로는 당대회나 회의 등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했지만, 실제로는 소수 최고 간부들의 결정을 형식적으로 따르는 수준에 머물렀다.공화국 차원에서는 정부 조직과 달리, 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에는 별도의 슬로바크 공산당(KSS)이 존재했지만, 체코 사회주의 공화국에는 이에 상응하는 조직이 없었다. 슬로바크 공산당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과는 별개로 등장했으나, 1948년 공산당 집권 이후 통합되었다. 1960년대 개혁 시기에는 각 공화국에 자율적인 당 시스템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체코 지역 당 사업을 위한 국이 잠시 설립되기도 했지만, 1968년 소련의 침공 이후 탄압받고 1971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지방 차원의 당 조직은 "지역 및 생산 원칙"에 따라 구성되었다. 최소 5명 이상의 당원이 있는 직장이나 주거지에 기본 당 단위가 조직되었다. 당원 수가 많은 기업이나 지역에서는 더 큰 단위인 시, 마을, 또는 공장 단위 위원회의 지휘 아래 여러 소규모 단위가 활동했다. 이론적으로 지역 조직의 최고 권한은 매달 열리는 당원 회의에 있었으며, 모든 당원은 이 회의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다. 각 기본 단위는 자체 지도부(의장, 서기 등)를 선출하고, 상위 단위(시 또는 지역) 회의에 대표를 파견했다.
3. 3. 당원
1946년 선거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의 당원 수는 100만 명에 달했다.[3] 그러나 1948년 집권 이후, 당 이념가들은 당원 명부에 비활동적이거나 기회주의적, "반혁명적" 요소가 많다고 주장하며 이를 근거로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이어진 첫 번째 숙청에서는 거의 100만 명의 당원이 제명되었다. 프라하의 봄과 그 이후의 침공에 이어진 1969년부터 1971년까지의 두 번째 숙청에서는 약 50만 명의 당원이 자발적으로 탈당하거나 제명되었다. 이 숙청은 특히 체코인, 청년, 블루칼라 노동자, 지식인 당원들에게 집중되었다. 1970년 말까지 KSČ는 1968년 1월 대비 약 27.8%의 당원을 잃었다.[23]숙청에도 불구하고 1971년 봄, KSČ는 약 1,45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거의 1,200,000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당시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인구 대비 당원 비율이었다.[23] 당원 수 감소에 대응하여 1970년대 후반에는 청년과 공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당원 모집 노력이 강화되었다. 1981년에는 당원 수가 1,538,179명(인구의 10%)에 달했다.[24] 1980년대의 당원 모집은 당의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데 더 적극적인 정치적, 직업적으로 자격을 갖춘 인물을 모집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1986년 제17차 당대회에서는 더 많은 노동자, 청년, 여성을 모집할 것을 촉구했다.
KSČ 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1년간의 예비 당원 기간을 거쳐야 했다. 예비 당원은 투표권이 없었고 당 위원회에 선출될 수도 없었다.
당원의 사상 교육과 훈련은 주로 지역 및 지구 조직의 책임 하에 이루어졌다. 이들 조직은 지역 당 조직과 협력하여 훈련 프로그램을 설정하고 교육 과정에 참여할 당원을 선정했다. 지구 또는 도시 조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본 원리, 공산주의 역사, 사회주의 경제, 국내외 문제에 대한 당의 현재 입장에 대해 주간 수업을 제공했다. 당 간부로 훈련받는 당원들은 지역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학교나 프라하, 브르노, 브라티슬라바에 있는 상급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세미나에 참석했다. 최고 수준의 당 교육은 프라하의 고등 정치 학교에서 제공되었으며, 이 3년 과정은 대학 프로그램의 공식 지위를 가졌다. 이러한 교육 기관들은 중앙위원회의 지휘 아래 운영되었다.
KSČ는 스스로를 노동자 계급 정당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당원의 사회적 배경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당은 당원의 정확한 구성 정보를 공개하는 데 소극적이었으며, 공식 발표는 종종 당내 노동자 비율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당이 집권하기 전인 1948년 이전에는 노동자 비율이 가장 높아 전체 당원의 약 60%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후 노동자 비율은 꾸준히 감소하여 1970년에는 약 4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다. 1970년대 초 정부 매체는 이러한 "심각한 불균형"을 비판하며 당의 계급 및 사회적 구조가 노동 계급의 선봉대 역할을 하는 당의 역할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중공업 지역인 보헤미아 중부에서는 노동자 35명 중 1명만이 당원인 반면, 관리자는 5명 중 1명이 당원이었다. 1976년, 노동자 영입 노력을 강화한 결과 노동자 비율은 당원의 3분의 1 수준(약 1962년 수준)으로 증가했다. 1980년대에는 경제 개발의 필요성에 따라 젊은 노동자 입당 우선 순위 규칙을 완화하고, 전체 노동자 비율이 감소하지 않는 한 지역 및 지방 위원회가 영입 정책에 유연성을 갖도록 허용했다.
당원의 평균 연령 또한 변화를 겪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당원의 30% 미만이 35세 미만이었고, 거의 20%가 60세 이상이었으며, 약 절반이 45세 이상이었다. 1971년에는 "50년 후, 50세 당원들의 당"이라는 풍자가 돌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젊은 당원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이 강화되었으며, 그 전략 중 하나는 기존 당원의 자녀를 영입하는 것이었다. 당은 젊은이들의 학교와 부모의 직장에 편지를 보내 자녀들의 입당을 장려했다. 1980년대 초에는 당원의 약 3분의 1이 35세 이하였으나, 1983년 "주요 간부"의 평균 연령은 여전히 50세로 추산되었다.
4. 역대 선거 결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제1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시기부터 주요 정당으로 활동하며 선거에 참여했다. 1925년 총선에서는 13.2%의 득표율로 41석을 확보하며 제2당이 되었으나 정부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이후 1929년과 1935년 총선에서는 10%대 초반의 득표율로 30석을 유지하며 제4당의 지위를 가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당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1946년 총선에서는 31.2%를 득표하여 93석을 차지하며 제1당으로 부상했고, 당 의장 클레멘트 고트발트가 총리가 되어 연립 정부를 이끌었다.[3]
1948년 2월 쿠데타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민족전선이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의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이후 선거는 민족전선 후보에 대한 찬반 투표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공산당은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계속 확보했다. 이 시기 선거는 공산당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벨벳 혁명으로 다당제가 부활한 뒤 치러진 1990년 총선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연방 의회 선거에서 약 13%대의 득표율로 제2당의 위치를 차지했으나, 과거와 같은 압도적인 지위는 상실하고 야당으로 전환되었다.
4. 1. 체코슬로바키아 총선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연립 정부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당은 급속히 성장하여 1946년 선거 당시 당원 수가 100만 명에 달했다.[3] 이 선거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31.2%의 득표율로 의회 제1당이 되었고, 당 의장 클레멘트 고트발트가 총리로 선출되었다.1948년 공산당 쿠데타 이후 자유 선거는 사실상 폐지되었고, 권력은 공식적으로 민족전선이 장악했다. 민족전선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나머지 5개 정당이 의석을 나눠 갖는 연합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공산당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으며 다른 정당들은 위성정당에 불과했다.
아래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주요 총선 결과이다.
선거 연도 | 지도자 | 득표 | 의석 수 | 순위 | 정부 참여 | |||
---|---|---|---|---|---|---|---|---|
득표 수 | 득표율 (%) | 획득 의석 | 의석 증감 | 총 의석 | ||||
1925년 | 요세프 하켄 | 913,711 | 12.86 | 41 | +41 | 300 | 2위 | 야당 |
1929년 | 클레멘트 고트발트 | 753,220 | 10.2 | 30 | -11 | 300 | 4위 | 야당 |
1935년 | 클레멘트 고트발트 | 849,495 | 10.3 | 30 | 0 | 300 | 4위 | 야당 |
1946년 | 클레멘트 고트발트 | 2,205,697 | 31.2 | 93 | +63 | 300 | 1위 | 연립 정부 |
1948년 | 클레멘트 고트발트 | 민족전선 소속 | 160 | +67 | 300 | 1위 | 다수당 | |
1954년 | 안토닌 노보트니 | 262 | +102 | 368 | 1위 | 다수당 | ||
1960년 | 안토닌 노보트니 | 216 | -46 | 300 | 1위 | 다수당 | ||
1964년 | 안토닌 노보트니 | 217 | +1 | 300 | 1위 | 다수당 | ||
1971년 | 구스타프 우사크 | 152 | -65 | 200 | 1위 | 다수당 | ||
1976년 | 구스타프 우사크 | 143 | -9 | 200 | 1위 | 다수당 | ||
1981년 | 구스타프 우사크 | 147 | +4 | 200 | 1위 | 다수당 | ||
1986년 | 구스타프 우사크 | 147 | 0 | 200 | 1위 | 다수당 | ||
1990년 | 라디슬라프 아다메츠 | 1,445,407 | 13.6 | 23 | -124 | 150 | 2위 | 야당 |
4. 2. 슬로바키아 총선
wikitext날짜 | 지도자 | 득표수 | 의석 수 | 순위 | 정부 참여 여부 | |||
---|---|---|---|---|---|---|---|---|
# | % | # | ± | 규모 | ||||
1928년 | 마테이 크르샤크 | 190,595 | 14.42% | 5 | +5 | 54 | 3위 | 야당 |
1935년 | 빌리암 시로키 | 185,494 | 12.27% | 5 | 0 | 54 | 4위 | 야당 |
1938년 | 선거 금지. 흘링카의 슬로바키아 인민당이 유일한 합법 정당임. | |||||||
1946년 | 카롤 슈미드케 | 489,596 | 30.61% | 31 | +31 | 100 | 2위 | 연립 정부 |
1948년 | 슈테판 바슈토반스키 | 민족전선의 일부 | 78 | +47 | 100 | 1위 | 다수당 | |
1954년 | 카롤 바칠렉 | 민족전선의 일부 | 47 | -28 | 103 | 1위 | 다수당 | |
1960년 | 카롤 바칠렉 | 민족전선의 일부 | 45 | -2 | 100 | 1위 | 다수당 | |
1964년 | 알렉산데르 둡체크 | 민족전선의 일부 | 58 | +13 | 92 | 1위 | 다수당 | |
1971년 | 요제프 레나르트 | 민족전선의 일부 | 102 | +44 | 150 | 1위 | 다수당 | |
1976년 | 요제프 레나르트 | 민족전선의 일부 | 101 | -1 | 150 | 1위 | 다수당 | |
1981년 | 요제프 레나르트 | 민족전선의 일부 | 102 | +1 | 150 | 1위 | 다수당 | |
1986년 | 요제프 레나르트 | 민족전선의 일부 | 103 | +1 | 150 | 1위 | 다수당 | |
1990년 | 페테르 바이스 | 450,855 | 13.35% | 22 | -81 | 150 | 4위 | 야당 |
4. 3. 체코 총선
wikitext년도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 수 (총 200석) |
---|---|---|---|
1968 | 알려지지 않음 | 89 | |
1971 | 129 | ||
1976 | 111 | ||
1981 | 138 | ||
1986 | 137 | ||
1990 | 954,690 | 13.24% | 33 |
5. 역대 지도자
총서기 (1929년–1945년)
의장 (1945년–1953년)


제1서기 (1969년–1971년)
총서기 (1971년–1987년)